제2차 세계대전의 암호학과 암호 해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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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암호학과 암호 해독학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강력한 무기? 많은 병력?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보 역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일 겁니다. 상대가 무엇을 할지 알고 있다면 쉽게 승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정보를 지키거나, 적군의 정보를 얻기 위한 많은 노력과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 중 암호학의 기원과 에니그마(Enigma) 암호 해독에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암호학과 암호 해독학


▶ 암호학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정보일 것입니다.

적보다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으면 승리를 확보할 수 있죠.


국민의 생명과 전쟁의 승패가 달린 민감한 정보를 보호하려면 개인, 단체 국가 차원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암호학 및 암호 해독학의 역사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암호학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기원


암호학(Cryptology)은 숨겨진 비밀을 뜻하는 그리스어 “kryptós”와 학문을 뜻하는 “logia”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암호학은 여러 가지 정보를 보호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현대에는 컴퓨터공학이나 첨단 보안 장치와 연관된 학문입니다.


그러나 암호학이 현대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전에는 “암호화”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암호화라고 하면 괴상한 부호나 말도 안 되는 단어가 잔뜩 적힌 문서를 떠올리게 됩니다.


누군가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고 그 열쇠만이 문서나 정보를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프랑스 헨리 2세의 문장이 각인된 16세기 책 모양의 프랑스 암호 기계


원래 암호학은 메시지를 기밀화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문서를 비밀 공작원, 군부대, 외교관 등에 전달할 때 열쇠가 없으면 읽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죠. 아주 오래전에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암호였습니다.


그리스인, 특히 스파르타 군대에서 암호를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심층 암호(Steganography)를 사용하여 메시지 자체를 숨기는 것이죠. 심층 암호는 고대에 개발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사용된 것은 노예의 머리를 밀고 메시지를 문신으로 새겨 머리가 자라면 자연스럽게 메시지가 감춰지는 방법입니다.

 


1546년 프랑스 외교관 Gabriel de Luetz d’Aramon 이 일부를 암호화하여 오토만 제국에 보낸 문서


암호에 사용한 장치도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키테일(Scytale)은 스파르타인이 암호 해독에 사용된 나무봉입니다. 이후 중세 시대에는 구멍이 뚫린 골판지 등을 종이 위에 올려 두고 글을 써서 암호화하는 사이퍼 그릴(Cipher grille)[위키 백과(영문)]이라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 애니그마 암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컴퓨터가 암호화에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암호 작성 방법이 매우 복잡해졌죠. 컴퓨터로 암호를 작성하는 새로운 방법은 수학적 이론과 컴퓨터 공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컴퓨터로 난해하게 암호를 작성하여 당시에는 해독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독일 정부와 군부가 1920년대 말과 제2차 세계대전 중 사용한 에니그마 장치입니다. 에니그마 장치는 독일 기술자 아르투어 세르비우스(Arthur Scherbius)가 제1차 세계대전 말에 개발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추축군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고위 작전 참모의 메시지를 암호화하는 데 사용한 독일 로렌츠 암호 장치


에니그마 암호는 폴란드 군사 정보부에서 근무하던 암호학자 Marian Rejewski, Jerzy Różycki, Henryk Zygalski 가 해독한 적이 있지만,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중반에 와서는 로렌츠 암호와 함께 가장 비밀스러운 교신 방법으로 통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정부 암호학교(GC&CS)가 영국 버킹엄셔 밀턴 케인스에 있는 블레츨리 파크에서 활동하며 추축군의 비밀 교신을 종종 간파하였습니다.


해군 사령관 앨리스테어 데니스턴이 1919년부터 1942년까지 정부 암호학교를 이끌었으며 블레츨리 파크로 위치를 옮긴 후 언어학자, 체스대회 우승자, 십자말풀이 전문가 등이 합류했습니다.

 


폴란드 암호학자를 기리는 포즈난(Poznań) 기념비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할 때 데니스턴 사령관은 영국 외무성에 “학자 같은 사람”을 모집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남성을 모집하였으며 사무직과 행정직에는 신뢰할 수 있는 여성도 모집하였습니다.


또한, 데일리 텔레그래프 신문에 십자말풀이 대회를 개최한 적도 있습니다. 장래성이 보이는 인물에게는 긴밀히 접근하여 “전쟁에서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특수한 업무”를 맡아달라는 식으로 인원을 모집하였습니다.


블레츨리 파크에서 근무한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 독일 해군 암호 해독을 담당하던 제8 막사의 수장 앨런 튜링일 것입니다. 앨런 튜링은 블레츨리 파크가 독일 에니그마 장치를 입수한 후로 독일 암호를 해독하는 다양한 기술을 고안하였습니다.


튜링은 에니그마 장치의 설정을 찾아내는 폴란드의 전산 기계 장치 “bombe”를 개선하였습니다. 또한, 대서양 전투를 포함한 많은 주요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암호를 해독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저 근처에 있는 제4 막사는 현재 박물관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암호 해독 활동이 절정에 이른 1945년 1월에는 9천 명이 블레츨리 파크에서 근무했습니다. 당시 업무량은 매우 극심했으며 업무 자체가 매우 지루한 작업이었습니다. 1년에 4주간 휴가를 사용할 수 있었으나 몇몇 여성은 작업 중 쓰러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독일 에니그마와 로렌츠 암호를 해독하는 것은 스트레스가 극심한 작업이었습니다. 사실상 해독할 수 없는 암호였으나,”말이 많으면 실수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듯 인적 과실이 가장 큰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독일 암호화 절차의 결함과 기밀 유지를 어긴 자에게 내려지는 가벼운 징계 처분이 큰 약점을 만들었습니다. 블레츨리 파크 암호 해독반은 아주 작은 실수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독일이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전쟁에서 승리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블레츨리 파크에서 해독한 암호는 “최상위 비밀”로 분류되었습니다. 당시 최고 분류이던 “일급 비말”보다 높은 단계죠. 그만큼 극비로 진행되는 작업이었습니다.

 


블레츨리 파크 국립 암호 센터에 보관된 bombe 복원품


암호 해독반에서 근무한 모든 직원은 공직자 비밀 엄수법(1939)에 서명했습니다. 1942년에 발령된 보안 주의보는 암호 해독 업무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식사 시간, 대중교통, 이동 시, 숙소, 화롯가에서 말을 하지 말고 업무를 하는 장소에서도 조심해야 한다.”


블레츨리 파크는 다양한 추축군 정보를 알아냈으며 막사별로 다른 정보를 담당하였습니다. 정보 보고부와 독일, 이탈리아, 소련, 일본의 신호를 각각 도청하는 부서도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영국 정보부를 연구한 한 사학자는 블레츨리 파크 덕분에 종전을 2년에서 4년 정도 앞당길 수 있었다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누가 전쟁에서 승리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현재 블레츨리 파크는 교육적, 역사적 명소로 그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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